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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의 매직 라이프 - ‘원주민의 꿈’ 페스티벌에 가다

마고의 매직 라이프

글과 사진  마고



‘원주민의 꿈’ 페스티벌에 가다




여름방학이 되자 아이들은 열흘 동안 친할머니 댁으로 바캉스를 떠났다. 
두 살 반인 막내까지 떠나고 남편과 나만 남은 집은 휑하기 그지없었다. 
막내까지 엄마 품을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 달 전부터 시누이와 계획을 짜고 시어머니는 바닷가 근처의 컨테이너 숙소까지 예약을 해놓으셨다. 
그래서 꿈같이 기다리던 나만의 시간이 왔다. 
‘아이들 없을 때 해야지’ 하고 평소 머릿속에 대강 담아뒀던 계획들을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모든 게 귀찮아졌다. 
심지어 밥을 하는 것도, 그릇 하나 닦는 것도. 아이들이 없으니 의욕이 사라지고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어졌다. 
그리고 하루 이틀 실컷 잠을 자고 나니 아이들이 벌써 그리워졌다.






바캉스를 떠난 아이들, 모처럼 찾아온 여유

인터넷에서 별 쓸데없는 것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월요일, 사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들도 없는데 뭐 하냐며, 자기랑 같이 <원주민의 꿈(Reve de l'aborigene)> 페스티벌에 가자고 했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은 2~3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시어머니 댁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다. 
참고로 사라는 한 달 전에 남편과 헤어지고 유목민처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고 있었다. 
예전부터 함께 어디든 가자고 말만 했지 아이들을 핑계로 미루고 있었는데, 아이들도 없으니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자고 한다. 
사라는 페스티벌까지 아직 일주일이 남았으니 인터넷이 되는 곳에 가 티켓을 알아보고 화요일에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주로 집 전화나 페이스북 메시지로 그동안 연락을 해왔는데 그녀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게 되면서 연락이 어려워졌다. 
현재 사라가 잠시 묵고 있는 흙집은 인터넷은커녕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었다. 
‘티켓을 구하면 가겠다’고 말은 해놨지만 사라가 티켓을 구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왠지 흐지부지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막상 화요일이 되니 귀찮아져서 속으로 은근히 사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오후가 되자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사라는 신이 나고 흥분한 목소리로 티켓을 구했다며, ‘자기는 금요일과 일요일 티켓밖에 구하지 못했는데 내 것은 3일치 티켓을 구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돈은 조금씩 생기는 대로 달라’고 했다. 






더치페이가 심한 이곳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기에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서 가방을 싸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 또한 너무도 흔쾌히 나에게 바람도 쐴 겸 페스티벌에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는 하루 일찍 페스티벌에 가기로 했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배낭을 쌌다. 
사라 말로는, 그곳에 요리할 수 있는 공간도 있고 야채도 있다고 해서 쌀과 간장만 챙겼다.
아이들이 없으니 큰 짐을 쌀 것도 없었다.
침낭 그리고 책가방 하나에 옷가지 몇 개와 칫솔을 넣으니 가방은 반도 안 차게 가벼웠다. 
사라는 나보다 열 살이 어린데 우리 둘째, 셋째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둘 있다. 
점심에 도착한 사라, 사라의 둘째 아이 가야와 밥에 물김치와 김을 맛있게 먹고 길을 떠났다. 
가야는 맨밥만 한 입 맛보고 막대사탕만 먹었다. 




아이들 없이 휑한 마음으로 떠난 페스티벌

창문이 하나만 열리는 사라의 찜통 같은 차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잘만 달렸다. 
페스티벌에 혼자 가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 어색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없어 허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3일이라는 시간이 지겹지만은 않기를 차 안에서 바랐다. 
사라, 그녀에게서 나름의 아주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간이 금방 흘러 우리는 페스티벌 장소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사람들이 페스티벌 준비를 하는 것을 구경했다. 
<원주민의 꿈>은 40여 명의 오거나이저와 15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650여 명의 사람들(열여섯 살까지는 입장료를 내지 않으며, 많은 히피들이 외국에서 오기도 한다)이 오는 16년 역사의 꽤 알려진 페스티벌이었다.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이 페스티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건조화장실을 청소하거나 나무를 자르거나 분리수거를 도와주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하는데 그들의 독특한 분위기와 에너지가 페스티벌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술을 팔지 않는 페스티벌이 점점 사람들의 인식에 좋게 확산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어울리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사라는 설명해줬다. 
아이들이 없는 텅 빈 그네를 보고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 내 눈에서 눈물이 다 나왔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사라 애인의 천막 옆에 텐트를 치고 사라와 가야와 함께 자기로 했다.






저녁이 되니 천둥과 번개가 치며 으슬으슬 추워지자 갑자기 가야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에 당황해하고 불편해하는 프랑스인 중 하나인 사라가 급히 아이를 달랬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가야 옆에서 나는 젖은 치마를 손으로 만지며 ‘혹시 내일도 비가 오고 우중충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급격히 떨어지는 온도에 맞춰 옷도 챙겨오지 않고 홀가분하게 떠나온 것을 후회했다.
‘내일부터 3일간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세 아이의 엄마라는 나의 자리에 익숙해져서인지 아이가 내 곁에 없자 나는 무언가가 아주 많이 허전했다. 
무엇보다도 만난 지 15년 동안 거의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는 남편도 많이 보고 싶었다. 




페스티벌 전야제에서 만난 할아버지

사라 커플 사이에 껴 있기가 그래서 손을 뒷짐 지고 혼자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사진기를 꺼내는 것도 어색했다. 
어디를 가도 통한다는 전 세계 공통어인 미소를 짓고 걸었다. 
바보 같아 보일까 봐 대형마트 같은 곳에 가면 잘 웃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웃는 게 통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열심히 자신의 노점을 설치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슬렁슬렁 걸었다. 
티베트 볼이나 불교에 관한 책 등 영적인 것들을 파는 스탠드들이 많이 보였다. 
염주를 목이나 팔에 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대형마트에서도 불상을 파는 이곳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오지’라고 부르는 세계 각국에서 온 물건들이었다.
인도와 티베트 혹은 남미에서 온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배가 나온,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의 스탠드를 구경했다. 
할아버지의 스탠드에는 사진과 글이 프린트된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양한 부족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소수의 백인들에 의해 파괴돼 점점 사라져가는 아마존 부족들, 아프리카 부족들의 사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직 축제가 오픈하지도 않았는데 동양에서 온 아줌마가 신기했는지 신이 나서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스탠드에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치적 학살과 전쟁, 만행들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해 ‘왜 그러냐’고 잘 묻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대부분 자원전쟁이고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미디어의 힘을 이용해 어떤 거짓 이유라도 정당하게 갖다 붙여 자원이 많은 곳의 자원을 무지막지하게 갈취해버린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폐이스북 주소를 가르쳐주면서 ‘계속 연락하며 좋은 정보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인터넷이 낳은 부작용도 많지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연결수단이 될 수도 있다면서. 
자본주의의 상술로 수많은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땅에 발 똑바로 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소개 마고 레게 
음악 뮤지션인 프랑스인 남편, 다람쥐처럼 온종일 뛰어다니는 아이 셋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마고는, 낮에는 살림을 하 고, 밤에는 사계절의 변화와 닮은 그림을 그린다. 
현재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연이 주는 무구한 은혜를 껴안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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